한국장로교신학 학장 서헌철 목사

터키 공화국은 국교를 명시하지는 않고 있으나 국민의 절대 다수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사실상 ‘이슬람교’가 국교이다(출처 : 위키백과)

터키는 한국전쟁 시에 UN군 중,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인 총 5,455명의 병력을 파병했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병력을 상륙시켰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터키를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 1949년 합법 정부 승인. 1957년 수교하기도 하였다. 터키인은 스스로를 '튀르크'라고 부른다. 튀르크는 한자 가차로 쓰면 ‘돌궐’이다. 한때 돌궐과 ‘고구려’는 동맹으로 우호적인 관계였고, 그 때문에 터키의 교과서에는 ‘고구려’와 '형제의 나라'라고 실려 있어 터키인들은 한국을 피를 나눈 형제라 생각한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주 터키 한국대사관에서 터키 교육부의 협조를 얻어 터키 역사 교과서들을 검토,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접촉이 기록되어 있으나, '형제의 나라'라는 표현이 터키 교과서에는 실려 있지는 않다고 한다. 하지만 터키의 고대사가 대한민국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은 교과서에 언급되어진다. 또한 최초 투르크계인 흉노가 한민족의 고조선과 강력한 동맹이었고 교류가 많았으며, 한민족이 신라의 거서간 마립간(khan) 각간(kagan)이라는 왕의 호칭과 가야의 김수로 신화에 나오는 9명의 칸(khan) 고구려의 대가, 고추대가라는 호칭을 투르크계보다 훨씬 먼저인 B.C.69년부터 썼다는 점이 있으며 투르크어로도 왕은 "한" "칸" 이라고 부른다.

사실 터키인들이 한국에 대해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튀르크 특유의 문화로서, '피를 나눈 형제(kan kardeş, 칸 카르데쉬)'라는 말은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 이웃국가에게도 흔하게 사용된다고 이전 문서에서 쓰여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즉 터키가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고구려와 한국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출처 : 나무위키 참고)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의 절대다수도 이슬람교를 신봉, 사실상 이슬람교가 국교인 ‘터키’에 대하여는 형제국가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이슬람교 인들에 대한 혐오감은 가히 적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이 혹시라도 국제적, 정치적인 문제와 뒤섞인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물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교지에서 각고(刻苦)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복음전도를 하는 선교사들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생각해 본다. 우리는 ‘요나’를 설교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떠한 신앙관으로 설교를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 ‘앗수르(앗시리아)’ 사람 ‘나훔’을 선택하여 자국의 심판을 예언하게 하셨으나, 분명 ‘요나’ 같은 인간을 통하여서도 ‘앗수르(앗시리아)’의 회개를 선포하시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인들을 무엇에 근거를 두고 판단하기에 혐오감을 들어내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진정 하나님께서 ‘앗수르(앗시리아)’에 ‘요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두로, 시돈 등까지 복음 전도를 하셨던 것같이, 사도 바울이 지금의 ‘터키’의 영토인 소아시아와 로마로 향했던 것과 같이 선교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은 누구를 사랑하기에, ‘터키’를 제외한 이슬람교인들은 물론 타종교인 등을 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

(10)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受苦)도 아니하였고 배양(培養)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亡)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城邑) 니느웨에는 좌우(左右)를 분변(分辨)치 못하는 자(者)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六畜)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合當)치 아니하냐(욘 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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