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중앙교회 김승자 목사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선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교회는 분열과 다툼, 증오의 모습난 보인다. 그 어디를 봐도 선한 곳이 없다. 교회는 교회대로, 연합단체는 연합단체대로 다툼의 늪에 빠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느 연합단체의 장은 자신이 이끄는 단체의 회원들을 향해 ‘OO끼’, ‘쓰레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범죄집단’으로 규정했다. 심지어 종로5가를 걸어 다니는 목사들을 향해 ‘걸어 다니는 시체’로 규정했다.

오늘 분열과 갈등, 그리고 증오가 만연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갈등한다. 칼뱅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또한 지옥에 갈 사람과 하늘나라에 갈 사람이 예정돼 있다고도 했다. 모든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삶의 현장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악한 길로 가는 사람들을 향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회개)”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다툼과 분쟁, 증오의 늪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분열을 획책하며, 기독교의 정체성을 뿌리 채 흔들어 버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념 간의 갈등, 계층 간의 갈등, 동서의 갈등, 남북의 갈등,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한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놓았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행동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은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다. 길거리는 환하게 밝아졌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는가?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입니다. 그렇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그 선한 일은 많은 이웃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다. 그것은 곧 이웃에게 옮겨져 아름다운 빛의 공동체를 만든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 나와 너, 그리고 그가 함께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길이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다" (요 5: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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