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운그리스도의교회 오수강 목사

교회의 토대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스승의 길을 걸어간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순교다. 제자들의 순교는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죽음에 기초했다.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순교로 이룬 피 흘림의 결실이다. 기독교 하면 십자가가 표상이요 십자가 하면 희생과 죽음이 그 내용이다. 예배드리는 건물을 잘 지었거나 못 지었거나 크나 작거나 건물 정면 머리에 십자가를 세웠다면 그곳은 교회다. 교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특별한 소명이 있다. 이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복음 선포이다. 복음 선포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늘의 소명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복음 전도가 중대형 교회에 속한 신자들에게는 쉬운 일일지 몰라도 작고 초라한 교회는 무척 어려운 현실이다. 사회인들도 중대형 교회 속한 신자들이 하는 전도는 관심을 보여도 작거나 개척 도상에 있는 교회 신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잘 들으려 하지 않고 측은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다. 이러한 환경을 누가 조성하였을까? 역시 힘이 없는 신자들이 아니라 힘이 센 신자들 즉 눈으로 보기에도 경제적으로 든든한 중대형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전할 때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느냐? 누가 전해도 사회인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차별 없이 같은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왜 이러한 풍조가 나타났을까?

복음은 영혼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져야 만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점도 있다. 기존 전도나 선교 정책 중 하나는 경제적인 문제가 첨예하다. 모든 일에 결국 비용이 들어가게 된다. 선교나 전도의 예산이 넉넉한 교회는 물량, 인적 자원이 풍부하여 계획에 맞게 이루어지나 어려운 형편의 교회들은 모든 것이 부족해 전도에 효과를 잘 살리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부한 교회는 더욱 모든 분야에 부하게 되고 어려운 교회들은 점점 더 어려워져도 속수무책이다.

한국 교회가 숙제와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 중 하나는 작고 어려운 교회들이 복음 전도나 선교에 걱정 없이 대처할 수 있도록 부한 교회들의 협력이다. 금전적으로 도와주거나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전도에 최소한 기독교인의 윤리나 도덕을 허물지 말자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이미 다른 교회에 등록한 신자들에게는 복음 전도 대상자에서 제외해 달라는 뜻이다. 내 교회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개척교회나 작고 어려운 교회 신자들을 데려오지 말자는 이야기다. 성경에도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이 범한 죄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면서, 어떤 부잣집에 손님이 오자 자신의 집에 수많은 양을 아껴두고 가난한 집의 딸처럼 애지중지 키우는 한 마리뿐인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는 예화를 들려주었다. 다윗을 회개하도록 한 기록은 오늘 교회가 다시 읽어야 할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는 작은 교회에서 애지중지하는 어린양과 같은 신자를 쉽게 중대형 교회의 빈자리 채우기 위해 바르게 말하면 모시고 가버리지만, 심하게 표현하면 빼앗아가는 꼴이다. 다윗이 범한 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실정이 아닌가? 그리고 신앙이 들지 않은 초 신자들은 자신이 어떤 의미로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지도 잘 모를 때에 일이기에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천명, 이천 명, 만 명,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아 그 위에 무엇을 더하려고 기존 신자들을 전도와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신앙인의 선한 양심은 어디에 두고 전도와 선교라는 포장으로 양몰이를 해 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중 대형 교회에 새 신자 등록 대부분 기존 신자들(?)이 아닌지?

그런데도 개척 도상 또는 작은 교회들은 세속기업가 정신이 아니라 선한 목자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한 생명을 사랑하여 전도와 선교에 임한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이제 신앙이 성장하여 교회에서 제 역할을 기대할만한 신자들이 중 대형 교회의 차원이 다른 선교와 전도의 마수에 걸려들까 걱정이다. 설마 하지만 이로 인해 빈자리가 더 늘어날 때는 치미는 울화를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다. 그래도 답답함을 들어주시는 주님께 새벽 제단에서 한나처럼 중얼거릴 수 있음을 감사히 여겨 어금니 악물고 또 전도와 선교에 나서서 이겨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다시 한번 죽을힘 다해 전도와 선교에 임하지만 그 결실은 미미하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믿음으로 열심히 복음 선교에 희망을 건다. 비록 그 결과가 인간 세상의 성공 잣대와는 무관할지 몰라도 희망은 복음 전도다. 오늘 전도로 한 생명 구원에 기뻐하고 내일 그 생명이 내 어망을 빠져나갈지는 모르는 데 그래도 전도와 선교에 희망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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